나의 2008년까지 내가 생각하고 내가 겪은 대한민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목 차
이 책을 쓰면서
1. 전략가와 대한민국
대~
대~한 민국
TV 선전 중에 “다시 태어나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싶으십니까? 긍정의 힘”이라는 CF가 있다. 과연 “당신은 다시 태어나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나고 싶으십니까?”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008년 말 전 세계적으로 금융 위기가 닥쳐 세계를 선도하는 G20, 즉 세계를 대표하는 20개국의 정상과 재무장관들의 회의가 연달아 열렸다. G20 즉 지구의 Great 20에 우리나라가 들었다는 대에서 일단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데 이 책의 초반에 언급했듯이 난 G9을 원하고 있고 우리 국민도 복지가 동반된 G9의 그 아홉 번째 나라가 대한민국이 되길 바란다. 세계를 선도하면서 국민에게 사랑받고, 그 사랑을 받은 만큼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나라. 내가 원하는 G9의 대한민국이다. 그럼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은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적, 사회주의적, 자본주의적, 복지주의적, 민주주의적 퓨전 국가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지금의 대~
주방장이 이렇게 양식과 한식을 요렇게 썩었다가, 오늘은 일식을 섞어 보기도 하고, 내일은 중국요리를 섞어 보다가, 확~뒤집고 다시 한식에 새로운 것을 접목시키기도 하고… 그러다가 매일매일 맛이 달라지기도 하고, 손님에게는 항상 맛이 같다고 우긴다. 이것이 오늘날의 대~
그런데 오히려 이것이 요즘의 국가 트랜드의 흐름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것이 선진국 G9으로 가는 걸음에 발목을 잡을 수도 있고, 잘 조합하고, 타협하고, 대화하여 선진국으로 가는 초석이 될지도 모른다. 난 후자 쪽으로 전략을 짜려고 한다. 어떨 때는 사회주의, 어떨 때는 자유주의, 이럴 때는 복지주의, 또 이럴 경우는 자본주의 말이다.
‘대~
나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을 느꼈던 기억을 되살려 보겠다. 내 이름은 이만주다. 어릴 적에는 선생님들이 꼭 만주 땅을 되찾으라고 하셨고, 중 고등학교 때는 문제풀이나 기타 등등, 출석표로 이름 불러서 시키는 것은 거의 내 이름이 먼저 불렸었다. 특히 국사 시간은 더했다. 내가 자라고 살아오면서 그래도 한 번에 내 이름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많아서 오히려 득을 볼 때가 많았다. 인터넷 검색으로, 아니면 미니홈피로 검색해 보면 몇 명 되지도 않는다. 어디 가서 사기도 못 친다는 이야기가 딱 맞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애국심이 남다르고 독도 문제나 동북공정 등의 문제가 뉴스를 통해 나오면 괜히 흥분하고, 일본과 축구시합이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흥분되어 일이 잘 안 잡힌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대한민국 대표팀 응원복장인 붉은악마 복장으로 돌아다니며 일을 보았다. 축구 경기가 시작되면 “아~참” “그것도 못 넣어? 야! 거기서 내가 차도 들어가겠다” 등등, 다양하고 거친 입담으로 집안을 장악한다. 그러다 지기라도 하면 그날은 잠도 잘 못 잔다. 새벽 경기라도 볼라 치면, 내 골 세레모니에 온~집안식구가 다 깬다.
사실 국내에 있으면 대한민국의 소중함을 잘 모른다. 내가 미국땅을 처음 밟을 때의 이야기이다. 난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미룬 채 여의도에 있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고 그 돈으로 미국행 비행기표를 샀다. 대한항공이 너무 비싸서 엄청나게 싼 표를 찾다가 유나이티드항공 편에 몸을 싫고 미국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 내 나이가 22살이었다. 당시는 미국으로 유학 간다면 다들 와~~~하면서 쳐다봤다. 그래서 친한 중학교 동창 중에 내가 유일한 유학파다. 내 자랑은 절대 아니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비행기 안은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난 태어나서 담배를 한 번도 펴 본 적이 없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스튜어디스한테 물었다. 내 좌석은 비행기 꼬리 부근이었다. 스튜어디스는 여기는 담배를 피울 수 있다고 했다. 그 당시는 그랬다. 비행기 뒤꼬리 부근 좌석은 백인, 흑인, 알 수 없는 인종, 동양인인 나, 정말 시끄럽고 아~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다. 내 기억으로는 대부분이 본국으로 가는 미군들이었고 비행기에서 트럼프게임을 하고 자기 자리를 이탈해서 서로 떠들고, 스튜어디스도 통제하려 해도 제어가 안 됐다. 나도 아무 말도 못했다. 영어를 못했다.
꾹~참고 시애틀로 날아가고 있었다. 내가 한국인이 많이 사는 LA로 유학지를 안 정하고 굳이 시에틀로 유학지를 정한 것은 한국인이 많이 없는 지역을 고르다가 시에틀이 미국에서 3년 연속으로 제일 살기 좋은 도시로 뽑혔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Drive Eye Shooting이라는 신종 범죄가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드라이브 아이 슈팅은 운전하다가 눈으로 아무나 보이면 총으로 쏘고 달아나는 것이었다. 충격적인 범죄다.
이런저런 이유로 시애틀을 유학지로 정했고, 난 다음날 있을 시험을 대비하여 기내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안 되는 영어로, 상대편을 볼 수도 없는데, 손짓 발짓까지 해가며 예약한 미국 가정집 하숙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시애틀 국제공항에 도착했고, 짐을 찾기 전에 입국수속을 받아야 했다. 좀 긴장이 되었다. 그런데 입국 심사대를 보니 다 백인인데 유일하게 콧수염을 기른 동양인이 보였다. 왠지 일본인 같았다. 그래도 그쪽 레인으로 줄을 서서 여권과 입학허가서를 보여 주며, “Hi! Nice to meet you.”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학생이야?” 하고 한국말이 들였다. 입국심사관이 한국사람이었다. 내가 외국에서 처음으로 만난 한국사람이었다. 너무 빨리 만났다. 난 아주 기뻤다.
인사를 하고 입국심사대를 빠져나와 짐을 찼고 이동하려 하는데, 공항 내에 지하철이 멈춰 섰다. 순간 당황했다. 그건 공항 내에서만 도는 지하 모노레일이었다. 난 일단 탔다. 그러자 일본말이 안내하기 시작했다. 짜증이 났다. ‘일본애들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떡하지… 이거 픽업 오기로 한 하숙집주인 못 만나는 것 아니야!’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듯한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어였다. 음성으로 안내는 안 되지만 한국어는 문자로 지원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가 1992년의 시애틀 이었다. ‘한국의 국력이 조금은 발전했구나’ 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난 그 안내판대로 목표지점에 내려 하숙집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하숙집 주인의 차에 타는 순간 그는 공항 픽업은 서비스 챠지가 붙고 지금 달라고 $50를 요구했다. 좀 기분 나빴지만 “역시 미국식이야” 하며 웃어넘기고 돈을 주었다. 내가 머물 곳은 지하 방으로 전화상과 달랐고, 침대만 제공되고 TV는 내가 사야 했다.
하숙생들이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일본인들이었다. 2명의 남자였다. 물어보니 같은 학교 학생이었다. 그래서 학교에 대해 물어보니 귀찮아하며 자기들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샤워 후 츄리닝으로 옷을 갈아입고 거실에 있는데, 그나마 친절했던 일본 아이가 나에게 다가와 츄리닝에 대해 물었다. 당시 내 츄리닝은 코오롱스포츠의 액티브 상표를 단 밝은 색 상하의 세트였다. 왜 그러냐?고 되묻자, 자기 방으로 안내하며 대형 포스터를 보여 주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이때가 1992년 가을이었다. 당시의 일본인들은 한국에 대해 이런 느낌으로 대했다. “그 옷 날 줄 수 없어?”란 말에 꾹 참았다. 난 안 되는 영어로… 일본 애들도 영어 참~ 안 되었다. 우리는 글로벌토크 Speaking and Body 로 대화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종합해 보니 원래 자기는 일본선수가 자기 고향 사람이라 무척 존경하고 있었고, 올림픽에서 꼭 금메달을 딸 줄 알았는데, 한국의
다음날 무사히 테스트를 마치고 미국에서의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학교 내 카페테리아에서 밥을 먹는데,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백인은 백인들끼리 밥을 먹고, 흑인은 흑인들끼리 밥을 먹고, 동양인은 동양인들끼리 밥을 먹고… 나는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러자 여자애 하나가 내 자리 옆에 앉았고, 바로 일본말로 물어보기 시작했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그 자리는 금방 한국인들로 꽉 찼다. 정말 신기했다. 한국인들은 내가 일본인인 줄 알고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이 현상은 아직도 미국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겉으로는 인종차별은 큰 범죄고, 없다고 하지만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도 또한 인종차별이고, 같은 인종들끼리 모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난 일부러 백인 테이블에 가서 앉아 보았다. 조용하다가 한 명씩 사라졌다. 그리고 곧 동양인들로 꽉 찼다. 흑인 테이블에도 가 보았다. 엄청난 그들의 질문공세에 내가 그 자리를 옮겼다.
난 시애틀 주제 한국총영사관을 찾아가기로 했다. 내가 원래 진취적이어서, 미국에 왔으니깐 이 지역에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국가공무원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소 엉뚱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그런데 이것이 후에 나를 구해주는 계기가 된다. 난 내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총동원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영사관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는 영어가 대사관밖에 없는데, 길에서 코리아 엠베서더를 물으니 “여기는 워싱턴주고, 너희 나라 대사관은 아마 워싱턴DC에 있을걸”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참 찾다가 포기하고 지나가는 자전거를 탄 경찰에게 물었다. 처음엔 경비인 줄 알았는데, 경찰이었다. 자전거 탄 경찰의 모습이 당시는 참 신기했다.
시애틀 주제 총영사관님의 이름은, 당시 나의 기억으로는 K영사님이었다. 아직도 그분을 잊을 수 없다. 참 고마우신 분이고, 나에게 대한민국을 느끼게 해주신 분이다.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러 갔는데 창구직원이 동양인이라, 또다시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그런데 일본인이었다. 하지만, 이 직원이 나를 지점장실로 안내했다. 지점장이 한국인 여성이었다. 난 수표도 만들고, 수표 쓰는 법도 배우고, 카드도 만들었다.
난 어느 정도 미국생활과 학업에 적응했고, 거주지도 아파트로 옮겼다. 그래서 방학기간에 이탈리아 친구인 안토니오와 스페인 여자친구인 문세와 300ZX를 타고 캐나다로 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밴쿠버에서 신나게 놀고, 다음날 차이나타운에서 식사하고 있었다. 창밖에 우리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우리가 막 식사를 시작하자 큰 트럭이 우리 시야를 가렸다. 트럭이 떠나고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우리 차가 털린 것을 알았다. 운전석과 조수석은 열려 있었고 우리 가방이 모두 도난당했다. 난 카메라와 여권, 학생증 등 내 신분을 증명할 모든 것을 잃어 버렸고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경찰에 신고했지만, 간단한 리포트만 쓰고 별거 없었고 기다리라고만 했다. 우리는 돈도 없어서 더는 캐나다에서 지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미국 국경까지 가기로 하였다. 우리는 차를 들이밀고 웃으면서, 완전하지 않은 영어로 상황을 설명하고 씩~웃었다. 그러자 미국국경수비대도 씩~웃으며 어디론가 인터폰을 했다. 난 아직도 그때가 생각난다. 너무 무모한 방법이었다. 셰퍼트와 5명 정도가 우리 차를 둘러싸고 우리를 연행했다. 그런데 안토니오와 문세는 그냥 의자에 앉히고, 나만 뒤로 수갑을 채웠다. 강하게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날 중국인 마약 밀수범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당시의 내 머리는 소위 스포츠형이었다. 난 백인들에게 인종차별을 당한 것이다.
우리 차는 밑에 거울을 비추고, 시트를 뜯어 보고, 마약 검사를 하고 있었다. 난 전화 한 통화만 하자고 부탁을 했고, 간신히 시애틀 주제 총영사인 K영사님에게 전화를 했다. 영사님은 늦은 밤인데도 친절히 전화를 받아주었고, 담당자와 통화를 한 후에 내가 임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게, 신속하게 대한민국 국민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팩스로 국경 담당 고위층에게 보냈고, 난 임시비자를 발급받고 풀려났다. 그리고 수갑채운 것에 대하여 그 경찰들과 급하게 달려온 정복을 입은 위 계급 담당자에게 공식으로 사과를 받았다.
그 후 난 새로운 여권과 비자발급으로 문제없이 미국에서 공부 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고마운 적이 없었다. 난 후에 머스아일랜드(시애틀에 있는 섬으로, 당시 빌게이츠 등 미국의 유명한 부자들의 집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에 있는 영사님의 관저에 초대받았고, 열심히 공부하여 대한민국을 위해 힘써 달라는 가르침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이지만, 미안하게도 내가 대한민국을 위해서 한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부터라도 대한민국을 위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어 이 책을 쓴다.
동부 버지니아로 친구를 만나러 갔다. 내가 있는 시애틀과는 비행기로 4시간… 비행기로 4시간을 가야 그들의 땅이 동서로 끝이 났다. 참 축복받은 땅이다. 친구의 이름은
시애틀에 돌아와서 LA로 혼자 여행을 갔다. 비행기로 LA공항에 도착하여 코리아타운으로 갔다. 이때가 1993년이었다. 안 그래도 LA흑인폭동 때문에 코리아타운이 폐허가 됐다고 들었고, 치안도 매우 불안하다고 들었다. 그래도 난 걸어서 코리아타운을 둘러봤다. 흑인들과 특히 멕시칸이 눈에 많이 띄었고, 한인들의 상권은 올림픽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열악했다. 올림픽가 옆 블럭을 지날 때에 멕시칸들이 나에게 마약을 사라고 손짓했다. 한국인들이 방송에서 육탄으로 총을 쏘며,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가게를 지키던 모습이 떠올랐다.
한국인 상점에서 내 수표를 받아 주지 않았다. 미국은 신용사회라 내 이름으로 된 수표에 내가 금액을 쓰고 사인을 해서 주면 계산이 끝난다. 나도 처음에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런데 LA상점과 호텔에서 내 수표가 시애틀에 있는 작은 은행의 수표라… 좀 난감하다고 했다. 나라가 너무 커서 이 지역에서 되면, 이 지역은 안 되고 그렇다. 미국은 큰 은행 몇 개와 수천 개의 작은 은행들이 있다. 이름도 제각각이고 은행이 망하면 우리처럼 국가가 일정금액을 지급보증 해주지도 않는다. 은행에 돈을 묵혀두지 않게 하여 번 돈을 경제활동에 제 투자하거나 소비로 유도하여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 같다. 그래서 현금이 부족했는데, 호텔직원과 나의 얘기를 들은 어떤 아저씨가 나에게 물었다. “자네 왜? 시애틀에서 여기까지 왔나?” 난 LA폭동을 TV로 지켜봤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나 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그러자 바로 나에게 호텔방을 잡아 주었다. 내가 돈을 부쳐 드릴 테니 계좌번호를 달라고 해도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인데, 그 정도는 내가 내줄 수 있어.” “내가 대한민국 때문에 이렇게 잘 됐는데…” 하시며 호텔비용을 계산하시고 벤츠를 타고 사라지셨다. 한국을 떠나면 모두 애국자라더니 난 끈끈한 조국애를, ‘우리’라는 것을 먼 미국땅에서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난 여러 나라를 경험하였고 가는 곳마다 한국인을 만났다. 특히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북한 대사관에서 직영한다는 평양식당의 육개장 맛이 그립다. 우리나라 육개장하고는 많이 다른 독특한 맛이었다. 그 육개장을 다시 먹으려고 독일에서 출발하여 간 적도 있다.
2002년 미국이었다. 난 2001년에 회사를 관두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이었고, 미국 LA에 있었다. 5월에 월드컵이 시작되었다. LA겔러리아와 코리아타운프라자에서는 월드컵 송이 울려 퍼졌고, 윌셔대로의 웬만한 음식점에 가면 월드컵 송을 들을 수 있었다. 윌셔대로는 롱비치에서 다운타운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로 말하면 태혜란로나 강남대로와 같은 LA에서 가장 발전하고, 많은 비즈니스 회사가 모여 있는 곳이다. 참고로 LA는 미국에서 2번째로 큰 도시다. 얼마 전에 시카고를 3위로 밀어냈다.
한인 상권이 커지고 활기찼다. LA폭동 이후 성공한 한인들은 재산을 숨기지 않고 윌셔와 올림픽가를 중심으로 건물과 빌딩을 구입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하나 걸러 하나가 한인들 소유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예전에 일본인이 샀던 빌딩을 한인들이 사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윌셔대로에 가면 한국말만으로 비즈니스를 할 수 있고 영어가 필요 없다. 그리고 한국인 스스로 순환 비즈니스가 가능하여 타인종이나 언어에 대한 걱정이 없다. 1993년에 LA에 처음 왔을 때 보았던 올림픽가와 윌셔 중간의 멕시칸과 흑인들이 마약을 팔던 어두웠던 두 블록은 모두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지금은 그곳에 한인들이 대형 콘도미니엄을 짓고 있다. 자랑스럽다.
월드컵 첫 경기는 폴란드전 이었다. 한국시각으로 낯 경기는 미국에서
한국의 길거리 응원은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당장 한국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길거리 응원을 유니비젼은 물론 미국 주류방송인 ABC, NBC, FOXTV, CNN은 특파원들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시시각각으로 생중계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문화나 음식 같은 방송편성은 모두 사라지고, 한국의 문화와 길거리 응원문화를 대대적으로 방송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꼭 빠지지 않는 것이 왜곡된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난 아직도 한국, 코리아 하면 코리안워를 이야기하는 미국인들이 이해가 안 돼지만, 그럴 수밖에 자료가 없이 만든 우리나라 정부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전쟁을 이야기하면 그전의 시대상황인 일제시대와 일본의 만행, 미국의 잘못된 인식에 의해 2차대전이 종전이 됨으로써 분단된 한반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전자는 꼭 빠진다.
미국언론에서는 이때, 한국을 디벨로프드 컨츄리(Developed Country), 즉 선진국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생중계 방송시작, 전 1시간을 우리나라와 일본을 소개하는데,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것에 훨씬 많은 시간을 배정했다. 재보았다. 훨씬 많았다. 그만큼 당시의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이야깃거리가 많았고, 즉 컨텐츠가 많았고 역동적이었다. 난 2002년 월드컵이 우리나라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했다고 생각한다. 이때부터 우리와 일본을 비슷하게 보기 시작했다.
LA길거리에 붉은색,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많아졌다. 겔러리아마켓에서 100불 넘게 장을 봤더니, 붉은악마 티셔츠를 주었다. 나도 입고 응원했다. 미국과의 경기에서 우리 집에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1996년 이민 2세인 미국시민권자, 코리안 어메리칸인 매형과 결혼한 누나네와 같이 중계방송을 보았다. 그런데 매형네는 미국과 한국을 동시에 응원했다. 난 처음엔 이해가 안 되었다. 아마 모든 재미, 재일 교포가 이런 상황일 것이다.
요즘 인기가 있는
무엇보다도 2002년 전에는 재팬 프리미엄이 있었다. 지금도 있지만… 그런데, 2002월드컵 이후 코리아 프리미엄이 생겼고, 한류도 생겼다. 아직은 일본에 비해 그 프리미엄의 가치가 작지만… 일본인들도 그전에는 우리가 동남아 사람들을 무시하고 보듯이 우리를 보았다. 내가 처음 미국땅을 밟았을 때 일본 남자들은 그랬고, 백인들도 그랬다. 일본 여자들은 친절했다. 아~주, 그런데 월드컵 이후에는 그들도 우리가 그들과 같은 그레이드로 올라오고 있음을 인식했다. 아직도 독일을 꺾고 일본에서 브라질과 결승전을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일본이 16강에서 떨어지고 한국이 8강에 가자, 미국언론으로부터 집중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미국이 8강에 올라왔기 때문이다. 미국은 강자만을 좋아한다. 일본인들은 한국이 결승전까지 가서 일본에서 경기했으면 좋겠다고 인터뷰했지만, 속마음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8강에 가고, 4강에 갔을 때, “제발 그만 하고 떨어져. 그만 그만~” 을 끼리끼리 모여 외쳤을 것이다. 난 일본인을 잘 안다.
코리안팀이 16강에서 이탈리아를 만났다. 한인들은 LA경찰국장인 폴 킴(한인)씨의 지원아래 LA시내 한복판에서 대규모 거리응원을 펼쳤다. 다른 인종과의 마찰이 우려되어 우리 응원단을 대규모 경찰병력이 둘러싸 보호해 주었다. 10년 전 LA폭동 때 우리를 그렇게 보호해 줬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응원을 유니비젼과 주류방송에서는 생중계하였다. 유니비젼과 주류방송의 리포터가 한 한인 고등학생과 인터뷰를 한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미국 주류방송의 리포터가 영어로 물으면 영어로 인터뷰하고, 유니비젼 리포터가 스페인어로 물으면 스페인어로 인터뷰하고, 한인방송이 한국말로 물으면 한국말로 인터뷰했다. 정말 자랑스러웠다.
LA가 있는 캘리포니아는 원래는 멕시코땅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전쟁으로 빼앗았다. 그래서 제2외국어로 스페인어를 어려서부터 배우는데 문법이 거의 같고 단어도 거의 비슷하고 발음이 좀 다른데 그것만 외우면 된다. 그러니깐 국가, 내쇼날이 스페인어로는 나씨오날 이런 식이다. 스펠링은 거의 같다. 사실 영어와 스페인어만 할 줄 알면 세계 어디에서도 말이 통한다. 캘리포니아에서 그냥 열심히만 고등학교까지 다니면 거의 다가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냥 글로벌 인재가 되는 셈이다. 부럽고 국가의 힘이 느껴진다.
16강 이탈리아전은 초반부터 치열했다. 전후반이 끝나고 우리도 지쳐버렸다. 우리가 이긴걸 알았을 때는 동이 터서 환했다. 20대 30대 할 것 없이 자동차 본넷트에 태극기를 감싸고 유리창에 태극기를 꽃은 채 경적을 울려댔다. 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한국인이라는 것을 숨기는 한인 2세, 3세가 많았다. 불이익을 받을까 봐서였다. 자랑스럽게 본넷트에 20대들이 태극기를 감싸는 것을 처음 본다는 이민 1세들의 눈에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8강은 스페인전인데, LA겔럭시 구단주이자, 우리가 잘 아는 LA레이커스 구단주가 LA레이커스 홈구장인 스테이플 센터(
미국 동부에서도 새벽에 안자고 월드컵 중계를 본다는 뉴스가 주류방송을 통해 나왔고, CNN은 연일 한국의 붉은 물결을 생중계했다. 심지어 특파원이 프라자호텔에서 서울광장을 보며 “한국은 지금 패닉상태”라는 말까지 했다. 우리나라 경기 중계방송 전에 유니비젼의 아나운서는, 여자는 붉은악마 티셔츠를 남자는 붉은악마 두건과 목도리를 하고 나와서 박수와 함께 “대~
이때 일본언론과 중국언론에서는 심판 매수설과 편파판정을 연일 보도하고 있었다. 특히 2002한일월드컵에서 한 골도 못 넣은 빵점 축구의 달인, 중국의 언론이 심하게 물어뜯고 있었다. 일본은 16강 탈락 됐을 때 좀 심하다가, 바로 수그러들고 8강 때는 오히려 우리 편을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은 우리 팀을 욕하면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격 이었다. 예선전에서 벨기에와의 경기나, 특히 러시아와의 경기를 보면 벨기에 선수나 러시아 선수를 일본 수비수가 헤딩을 못하게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옷이 너덜너덜하게 될 정도인데도, 심판은 페널티킥을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러시아에서 폭동이 났다.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는 폭동이 없었다.
난 비록 2002 월드컵 때 한국에 없었지만, 대한민국이 나에게 이렇게 소중하구나! 하는 것을 마음속 깊이 느꼈다. 그리고 영원히 내 가슴속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나! 이만주는 역사와 민족과 대한민국의 미래 앞에 이 책을 남기기로 결심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극도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관심 없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엔 반대하다가도 그 전략과 혜택을 들어보고, 자신에게 미칠 혜택을 들어 보면, 어떤 것은 국민의 90%가, 어떤 것은 국민의 80%가, 어떤 것은 70%가, 국민의 과반수가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될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원하고 필요한 전략과 비전을 제시하여 널리 국민을 이롭게 하는 것이 ‘국민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제시와 토론과 합의 말이다.
이 전략과 비전은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음식처럼 대한민국의 미래에도 좋고,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의 개인들에게도 좋다. 물론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다. 나도 그것을 잘 알고 그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꽃인 다수결의 원칙이 있는 것이다. 다수의 의견에서 지면 깨끗하게 승복하는 것 말이다.
전략만 있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난 대한민국 미래에 대한 전략을 짤 수는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권력과 힘은 없다. 그것의 결실을 맺게 해주는 실천력이 더 중요하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결단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결단을 했으면 국민에게 알리고 토론하고 합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는 국민의 힘에 달려있다.
“당신의 대한민국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가?”
“비비디 바비디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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