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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가 이야기(1편)

슈퍼파워코리안 2010. 7. 15. 13:36
(사진은 인터넷에서 발췌)

'비비디 바비디 부' 중에서


난 전략가이자 미래디자이너다
.

나의 성장 과정에서 본 대한민국에 대한 대략의 숨김 없는 이야기이다.
 
1970년에 태어나서 여러분과 동시대에 살아가고 있으며 부자와 서민을
모두 경험한 대한민국 대표 서민이다
. 우리 부모님은 소위 남자끼리 말하는
부랄 두 쪽으로 자수성가를 하셨다
. 60년대 암울했던 시기와 70년대 고속성장을
잘 넘기셨고
80년대에 빛을 발했다.

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때부터 부유한 집에서 잘 살았고, 내가 필요한
것은 꼭 손에 넣었다
. 초등학교를 영재 소리 들으며 4학년 때 학교를 대표하여
수학경시대회에 나갔고
, 전교회장으로 졸업했다. 소위 요즘 말하는 영재였다.
이미 1970년대 자동차가 집에 있었으며 1982년에 나이키를 신었고 같은 반
아이들은 그게 뭔지도 몰랐다
. 그 당시 학교에서는 수업시간 중에 집에 칼라TV
자동차가 있는 집의 아이들에게 손을 들라고 해서 집안 환경을 조사했다
.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지만 그때는 그랬다.
교실의 가운데 상단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지금 북한의 김정일처럼 말이다.
우리 집은 VTR도 있었는데 내가 설명을 해줘도 우리 반 아이들은 그게 뭔지 몰랐다.
당시는 선생님이 집에 칼라TV 있는 사람?” “집에 자동차 있는 사람?” 하고 물어
조사 했다
. 손을 들면 정말이야? 진짜 너네 집에 자동차 있어? 아버지 뭐 하시니?”
이런 식이었다. 나의 초등학교 때 꿈은 항상 대통령이었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1학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부반장이 된 것이다.
난 반장이 안 된 것에 대해, 우두머리가 안 된 것에 대해, 무척 실망하며 반장과는
친하게 지냈다
. 당시 반장이 나를 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반장의 집에 놀러 갔다.
반장은 군에서 소령이라는 직책으로 근무하시는, 아버지가 즐겨본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고 하였다
. 반 친구들 5명이 같이 놀러 갔다가 그들도 모두 그날 그것에 눈을
뜨게 되었다
. 당시 기억으론 플레이보이와 미국산 포르노잡지였고 미국산
섹스비디오였다
. 칼라였다. 우리는 큰 충격을 받고 여체를 처음 알았고 그 다음날부터
학교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 그 당시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담당해야 할
성교육을 부모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
난 반장을 공부로 한번도 못 꺾으며 1학년을 마쳤다.

2학년 때 나의 신체와 나의 정신에 이상 기운이 생기며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그때 난 내가 사춘기인지 몰랐다. 내가 만약 그때 사춘기인 것을 알고, 금방 지나가는
열병 같은 거란 걸 알았다면
, 글쎄~지금의 인생과는 좀 달라 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
난 중학교 2학년 때에 공부에서 손을 놓았고 반 아이들의 짱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에게는 맞고 다니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태권도
2단의
무술실력과 지금의 키와 같은
177센티의 키를 소유한 중학교 2학년에게는 반짱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

당시 중학교에서의 구타와 체벌은 너무 만연해있었고, 수시로 선생님에게 불려다녔다.
어머니가 학교에 왔다 가시면, 선생님은 웃는 얼굴로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당시는 촌지가 패션이었다.
잘사는 동네에 경찰하고 선생님 해서 3년 안에 집 못 사면 바보라는 말이 있었다.
당시의 난 운전기사가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던 시절이었다.
3
학년이 되어서는 다른 반을 접수해가며 영역을 넓히다, 성욱이라는 아이를 만났다.
난 더 이상 영역을 넓히지 않기로 했다
. 성욱이는 아직도 내 친구다.
당시의 중학교에서는 학교 폭력이 심각했다. 힘없는 아이들을 선생님과 사회가 보호해
줘야 하지만
, 그렇지 못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중학교 3학년 시절은 나의 인생에서 아주 재미있는 황금기였다. 이유는 내가
잃어버린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바꿔, ‘락커가 되겠다는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들국화, 부활, 백두산이 나의 우상이었고, 난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팀을
구성했다
.
당시 부모님은 나를 밀어줄 충분한 경제적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딴따라가
되려고 하냐
?”, 눈만 마주치면 잔소리와 고성이 오고 갔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1~2년 전만 해도 난 공부도 잘했고, 우리 집안의 희망이었다.
부모님은 병원을 지어 주신다며 의대에 가라고 하셨다.  그런데 내 꿈이 바뀌면서
 부모님의 희망이 무너진 것이다
. 부모님의 꿈과 내 꿈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에 중학교 당시부터 우리 부모님이 나를 밀어줬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이승철, 신해철, 서태지 씨와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았을까?
난 친구들과 기타를 들고 아버지 소유의 건물 옥상에서 자주 연습을 했고
DJ
와 락 밴드의 라이브가 있는 음악다방을 손님으로 드나들며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친구들과 뿔뿔이 흩어지고, 난 온 국민이 부러워하는
강남
8학군 S고교를 입학했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 재벌은 아니었고, 소위 뺑뺑이로
고등학교를 입학했다
. 고등학교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당시 최고의 시설과 최고의
서울대 합격률을 자랑하는 우리 학교는 학기초나 학기말에는 연일 신문이나
TV
통해 오르내렸다
. 학교를 등교할 때면 선생님들이 피켓을 들고 자가용으로 등교하지
말자고 외쳤다
. 하지만, 학교 안에는 선생님들의 차로 가득 찼고 당시의 선생님
월급으로 어떻게 그런 고급 차를 타고 다닐까
?’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분명히 집안이 원래부터 잘 사는 분이었을 것이다. 교문 앞에는 마치 도열하듯이
벤츠와 푸조 등
, 당시의 최고급 외제차들이 줄을 맞추어 아이들을 내려주고 있었다.
당시의 최고의 국산차인 그렌져, 소위 각그렌져는 한참 전이나, 한참 후에 아이들을
내려 주었다
. 로얄싸롱인 우리 집 차도 기사아저씨가 멀찌감치 전에 내려 주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시켰다. 고위층과 마주칠 필요 없다고 하셨다. 난 그때 부자도
등급이 있는 걸 처음 알았다
. 권력과 친한 부자와 권력이 없는 부자.

내가 본격적으로 한국적 자본주의를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지금 와서 얘기지만
요즘은 벤츠
, BMW, 외제차 하면 그냥 좋은 차 정도로 쳐다보며 개나 소나,
해삼 멍게 고동, 심지어 쭈꾸미들도 외제차를 타고 다니지만, 당시는 정말 빛이 영롱한
진주조개들만 외제차를 타고 다녔다
.
반에서는 재벌집 아이들이 누구누구라는 소문이 들려오고, TV광고로 접하던
기업들의 자식들이 꽤 많이 있었다
. 요즘은 어려서부터 외국으로, 특히 미국으로
많이 보내지만
, 당시는 우리 학교에 많았다.

학급에 배치받아서 임시반장을 뽑는데, 당시 소위 연합고사라고 하는 200점 만점의
고입고사를 담임 선생님이
“200점 만점인 사람?” 하고 묻자 3명이 손을 들었다.
강북에서는 학교 전체에 1명도 나오기가 어려운데, 우리 반에 3명이야. 그럼
가위바위보 해
.”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임시반장은 가위바위보로 정했다.
이 당시부터 강남과 강북의 격차가 엄청 벌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사실 음지가 양지가 되고, 양지가 음지가 된다.”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정부가
음지를 양지로 만들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
,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사람의
자식들이 강남에 몰려 있다 보니
30년간 그러지 못했다.

난 사진을 좋아하여 1학년 때 사진반 활동을 한 것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S
고교는 고등학교지만 대학교만큼의 많은 동아리가 있었다. 학교의 크기는 조그만
대학교 크기였으며
, 비가와도 체육을 할 수 있는 체육관, 매점, 메뉴가 화려한 식당,
도서관 등등국내 재벌의 자제, 국회의원의 자제, 별의 자제들이 한 반에 수두룩했다.

그런데, 우리학교는 사립이 아닌 공립 고등학교였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럼
강북과 강서
, 강동, 지방에도 우리 학교와 같은 수준의 시설과 선생님들을 확보한
공립학교가 여러 개 존재해야 하는데
, 하나도 없고 오히려 우리 근처에 하나가 더 있었다.
같은 학군에 말이다.
공립학교는 순전히 국민의 세금으로 짓는 학교다.
지역에 따라 차별을 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교육에서부터 대한민국의 평등은 깨지는
것이다
.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 난 입시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고 좀처럼 공부에 방향을
못 찾았다
. 성적은 좋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다 같이 끌고나가지 않았고
상위성적 위주로 학급을 운영하며 그 외의 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

3학년 때 같은 반에 꼴찌를 하는 꼴통이 있었다. 공부는 꼴찌고, 작은아이들을
너무 괴롭혔다
. 그런데 이상하게 선생님은 그 아이를 터치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나와도 여러 번 주먹다짐을 하려 했으나 그때 마나 선생님이 나타나 말렸다. 내가
화가 난 것은 그 아이는 앞번호 애들만 집중적으로 괴롭히고
, 뒷번호 애들과는
으르렁 만댔다
. 이런 아이들은 어느 곳에나 항상 존재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미스터리인 그 아이그 아이는 선생님이 골프 선수라고 했는데,
필리핀 전지훈련 중, 어느 다른 나라 전지훈련 중이라고만 하고 3학년 내내 학교에
잘 등교하지 않았던 것 같다
. 내 기억은 그렇다. 그래서 같은 동네 사는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 한때 나라를 접수했던 전00의 조카라고 했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 말을 해보지 못했다. 학교에 잘 안 나와서나도 같은 반 친구한테
들었다
.

대학입학용 체력장을 시험 보는 날이었다. 우리 학교를 이온음료 회사인
포카리스웨트가 후원하였다
. 포카리스웨트 광고로 치장한 대형 트럭이 운동장에 있었다.
100
미터를 뛰고 나면 포카리스웨트 복장을 한 누나가 한 개씩 주었다. 일개 고등학교
체력장에 기업이 후원한다
? 좀 이상했지만 맛있게 받아먹었다. 100미터 달리기 중에
늦게 들어온 아이의 기록이 먼저 들어온 아이의 기록보다 좋아서 잠시 소동도 있었다
.
이런 일은 그 당시 체육 시간에 체육 점수를 매길 때 가끔 있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돈의 위력인듯 싶다
. 난 던지기를 10번 던졌다. 10명은 모두 던지기 만점. 원래는
그렇지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 이 일에는 선생님들이 조직적으로 개입하였다. 체력장
만점을 못 맞는 아이들을 친구들의 도움으로 만점 맞게 하는 전략이었다
. 난 던져주고
싶지 않은 아이들 것까지 던져줘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 그래도 난 나았다.
윗몸 일으키기를 대신 해준 아이들도 있었다
. 대부분은 1,000미터 달리기를 하기 전에
기준점수를 넘어
1,000미터를 안 뛰는데, 그래도 1,000를 뛰는 아이들이 있었다. 공부
못하고 운동만 잘하는 아이들은 불만이 많았다
. 학력고사 볼 때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대신 시험을 보아 주지 않기 때문이다
.

대학입학 학력고사를 보고, 난 떨어졌다. 재수 준비를 하는 중에 졸업식이 있어서
학교에 갔다
. 그런데 난 큰 충격에 휩싸였다. 같은 반 친구가 이야기하는데, 직접 확인은
 못 했지만
, 그 아이들을 괴롭히는 꼴통 꼴찌는 볼링 특기생으로 K대학교를 가고, 골프
치는 아이는 골프 특기생으로
Y대학교를 입학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반에서 매번
일등 하던 반장은
, 전국에서 항상 공부로 열 손가락 안에 들던 반장은 서울대학교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 난 반장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반장은 평범한 집안의 자식이었다. 돈과 권력의 힘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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